에디터 | 현예진
포토그래퍼 | 김혜정
바람의 결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계절, 온기가 넘실대는 찻잔을 그러쥔다. 차는 몸과 마음을 훈훈히 덥힌다. 온도가 주는 영향도 있겠지만, 거듭 쌓인 시간과 정성이 만들어낸 효능인지도 모른다. 필름을 되감듯, 차의 처음을 향해 온기의 기원을 가늠해본다. 따뜻한 볕과 바람을, 때론 서리와 눈을 맞으며 이 땅에서 자라난 원물이 제다 전문가의 손을 거쳐 찻자리에 닿기까지. 오므오트는 찻잔 앞에 선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익숙함에서
솟아난 특별함
서울숲과 맞닿은 거리 안쪽으로 접어들면 등장하는 붉은 벽돌 건물. 지하로 들어서면 마치 바깥과 다른 세계에 당도한 것만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은 시즌마다 다양한 우리나라 차와 다식을 선보이는 오므오트다. 공간에서 느껴지듯 오므오트는 티 하우스의 보편적인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많은 티 하우스가 우드 소재와 빛을 활용해 따스함을 강조하는 반면, 오므오트는 블랙과 스테인리스 스틸을 활용해 어딘가 차갑고 현대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공간의 중심에는 커다란 바 테이블이 있어, 얼핏 보아선 파인다이닝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오므오트에서 경험하는 여정 역시 프라이빗 레스토랑을 닮았다. 파인다이닝의 셰프가 제철 요리를 선보이듯, 오므오트도 찻자리를 이끄는 ‘팽주’가 이 계절에 마시기 좋은 차를 내어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찾은 원물로 만든 우리나라 차라는 사실은 특별함을 배가시킨다. 오므오트의 슬로건인 ‘익숙함에서 오는 권태로움으로부터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문장에 정확히 부합하는 경험이다. 기존에 없던 기획으로 새로운 비주얼을 만든 것이다. 오므오트에서 경험할 수 있는 메인 콘텐츠 중 하나는 ‘티 세레모니’다. 오므오트의 김혜진 대표는 매장을 찾는 이들이 단순히 차를 음용하는 것을 넘어,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즐길 수 있길 바랐다. 티 세레모니는 시즌 콘셉트에 맞춘 네 가지 차와 다식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 차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용 차다. 옥수수수염차, 보리차, 헛개차처럼 카페인은 없지만 약류 효과를 지닌 차로 구성한다. 두 번째는 잎 차, 세 번째는 꽃 차, 네 번째는 블렌딩 티 혹은 디저트로 마무리된다. 코스에 맞춰 팽주는 각각의 차에 담긴 이야기를 덧붙인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이 시즌에 내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한다. 코스는 75분 동안 이어지며, 간단하고 재미있게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나라 차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물고 새로운 향유 경험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에는 우리나라 차를 향한 애정과 진심이 넉넉하게 배어있다.
“다도를 딱딱하고 조용하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저희는 차를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라요.”
겨울에 마시는
우리 차의 효용
김혜진 대표는 우연히 떠난 차 여행에서 오므오트 론칭을 결심했다. 서울에 위치한 찻집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 차는 희소했고, 있어도 유자차나 쌍화차 정도가 전부였다. 이를 계기로 수소문하며 전국의 다원을 찾았다. 살갗으로 느낀 우리나라 차는 무척 다채롭고도 입체적이었다. 그가 만난 한 제다 전문가는 미세한 날씨와 본인의 감정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차를 만들었다. 제다하기 전날 비가 왔거나, 아침에 안개가 많이 꼈거나, 서리가 내리는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제다는 깊은 맛으로 이어졌다.
“저희는 차 만드는 일이 예술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차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전국의 다원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현장의 이야기다. 전국에 고유의 기술력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다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나라 차는 좀처럼 조명받지 못하는 것일까. 제다하는 현장에서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차에 대한 인식의 부재였다. ‘카모마일’은 알지만 ‘금목서’는 생소한 것처럼, 대중이 느끼는 우리나라 차와의 거리감은 실재했다. 김혜진 대표는 우리나라 차의 아름다움과 차 문화를 많은 이에게 알릴 필요성을 절감했다. 나아가 낡은 인식을 깨고 감각적이고 재밌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차를 향유할 방법을 고민했다.
“어렵고 무거운 다도가 아니라 집에 있는 와인 디캔터로, 머그잔에 티백으로, 술잔 같은 잔에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요.”
오므오트는 매해 메인 콘셉트를 정하고 시즌을 세 개로 구분한다. 날씨별, 지역별로 맛이 다르기 때문에 해마다 콘셉트에 변주를 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24절기를 주제로 시즌마다 각각 메뉴를 구성했다. 절기마다 풍속이나 속담, 문화, 당시 많이 음용했던 원물에 대한 내용을 녹여낸 것이다. 올해의 메인 콘셉트는 한국의 화폐다. 천 원권과 만 원권 시즌, 오천 원권 시즌, 오만 원권 시즌으로 구성돼 있다. 천 원권 뒷면에 새겨진 ‘계상정거도’ 속 안개 낀 산과 강의 모습을 가을에 첫서리를 맞은 꽃잎 차로 구현하거나, 오천 원권 속 ‘초충도’를 수박 소르베와 맨드라미가 들어간 시그니처 블랜딩 티로 구성하는 식이다. 김혜진 대표는 “언제나 중요한 것은 계절”이라고 말한다. 날씨와 계절에 잘 어울리는 차를 선별해 제공하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다. 더운 여름에는 대나무잎차를 아이스로 냉침해서 제공하고, 겨울에는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감잎차, 잭살차, 시그니처 티를 선보인다. 다가오는 시즌에는 따뜻한 성질의 홍차와 비타민이 다량 함유된 유자 블렌딩 티 ‘홍유’도 만날 수 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추운 계절에 마시는 오므오트의 차는 몸을 데우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인공적인 감미료를 배제한 원물을 사용하기에 더 건강하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아
오므오트의 특별함은 우리나라 차를 주력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차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한국 문화를 담아낸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주기적으로 국내 유수의 공예 작가, 국악을 다루는 음악가, 미술관 등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다. 특히 공예품과의 접점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차를 마실 때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 바로 ‘다기’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찻잔을 보고, 두 손에 감싸 쥐고, 입술을 닿는 모든 과정에서 다기의 존재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김혜진 대표가 오므오트 오픈을 준비하던 당시 쉽게 찾을 수 있는 다기는 대부분 중국 제품이었다. 우리나라 차를 선보이는 만큼 우리나라 작가의 다기에 담아내면 좋겠다고 판단한 뒤, 테이블 웨어 및 티 웨어를 전개하는 국내 작가들을 찾아 나섰다. 시즌 콘셉트와 부합하는 작가를 섭외해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고 한정 수량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오므오트 다기의 99%가 한국 제품이다. 공간 한쪽에 우아한 실루엣의 도자기가 선반을 채우고 있을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이들이 선보이는 퍼포먼스와 플레이팅에서도 다기를 하나의 오브제처럼 연출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차를 마시는 것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의 여정을 디자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때론 오래된 제품을 공수해 비주얼을 완성하기도 한다. 한약재를 갈 때 사용했던 ‘약연’을 구해 차를 넣고 가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이다. 대중에게는 생소할지라도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기에 좋은 장치가 되어준다. 어떤 퍼포먼스로, 어떻게 우려서, 어떤 잔에 담아낼 것인가도 오므오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다.
“경직된 형태로 차를 제공하면 많은 분이 어렵게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상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차 문화를 만들려고 해요. 커피처럼요.”
우리나라만의 다법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다도를 따르고, 중국에도 다법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다례는 조선시대 때부터 쇠퇴해 왔다. 김혜진 대표는 오므오트에서 만나는 문화가 처음 인식하는 우리나라의 다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점을 고려해 전체적으로 한국 문화를 녹여냈다. 절제된 색상과 미니멀한 구조의 내부 인테리어, 우리나라 전통 악기와 앰비언트 사운드, 한국 작가의 다기 작품과 국내 곳곳에서 공수한 차. 익숙한 듯 낯선 과거와 현재의 중첩이 한 공간에서 아름답게 재구성된다. 클릭 한 번에 지구 반대편 물건을 구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본질로 회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혜진 대표는 이럴 때일수록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전통의 아름다움을 현대에 가져오려고 고민했어요. 본질을 마주하고, 옛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더 새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우리나라 차, 우리나라 전통 문화예술을 향한 밀도 높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찻잔에 담긴 진심은 전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좋은 것을 경험한 뒤,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처럼. 입 안을 가득 채운 찻잎 향이 뭉근한 기지개가 되어 현재를 풍부히 채워낸다.
LIFESTYLE LAB 매거진 Vol.8에서
기획·편집·제작 | 어라운드 A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