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 이은주
포토그래퍼 | Hae Ran
봄처럼 강한 계절이 있을까.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꽁꽁 언 흙이 겨우내 앓았던 찬기를 털어내면 곧 새순이 기지개를 켠다. 자연의 변화가 면밀히 드러나는 만큼 희망이 선명한 시기다. 일러스트레이터 강한의 그림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위로가 된다는 점에서 꼭 봄을 닮았다. 화사한 색감과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봄의 언어가 되어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말없이 다독인다. 봄볕처럼, 봄꽃처럼, 혹은 봄바람처럼. 다정하게 피어나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 포근한 위안을 남긴다.
작가님,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 강한입니다. 성이 강씨인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강한 땡땡’이라 불렸는데요. 우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서 그 별명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강한’을 애칭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름처럼 단단하고 힘차게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작업실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곳곳에 세라믹 작품이 많네요. 아기자기한 모양이 마치 작가님의 그림을 3D로 구현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만들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취미생활로 공방에 나가 세라믹 아트를 배우고 있어요. 원하는 게 없으면 직접 만들어요. 가끔은 갖고 싶은 작품이 너무 비싸서 만들 때도 있고요. 하지만 작품이라 하기에는 아직 멀었죠. 귀여운 걸 만드는 행위 자체는 즐겁지만, 취미가 일이 되면 재미가 반감해요. 머리를 식히고자 시작한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아서, 세라믹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것만 만들고 본격적인 작업은 미루고 있죠.
작가님은 자신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아는 분이군요.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아이들은 보통 ‘화가’를 꿈꾸는데요. 상업적인 성격의 ‘일러스트레이터’를 구체적인 꿈으로 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에는 잡지와 인터넷 매체에서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특히 웹상에서는 회화보다 일러스트 작품을 구경하는 게 훨씬 쉬웠죠. 한번은 이름 모르는 외국 작가가 한국 브랜드와 협업한 작업에 마음을 뺏겼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콜라보의 개념이 흔하지 않았고,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었죠. 그래서 기성 브랜드와 작가가 특별한 상품을 출시한 걸 보고 처음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됐어요. 내 작품이 그림으로 소비되는 걸 넘어서, 상품화되거나 광고로 노출되면 좋겠다는 꿈이 생긴 거죠.
상업 미술 씬에서 활발히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니 어찌 보면 꿈을 이룬 것과 같네요. 일상, 사랑, 패션, 노스텔지어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요. 그림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으면 좋겠어요. 위로는 현대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주제예요. 시국이 혼란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여러모로 팍팍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날이 서 있어요. 본래 초식동물처럼 심성이 순한 사람들이 외부의 낯선 공격 때문에 뿔을 세운 것처럼 변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정한 그림 한 점을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제 그림이 민들레 홀씨처럼 이리 퍼지고 저리 퍼져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죠. 가끔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저의 그림을 보고 엉망이었던 하루가 다시 좋아졌다고, 혹은 힘들었던 마음이 단숨에 치유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팬들의 공감을 확인할 때 저의 그림이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며 뿌듯해져요.
작가님은 그림으로 위로를 전하고, 그림을 소비하는 팬들로 인해 다시 위로받는 구조가 선순환하네요. 모토로 삼은 ‘너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립니다’를 살펴보면, 모두의 취향을 아우르는 걸 지향한다는 점에서 팬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상업 미술은 결국 소비되기 위해 생산되는 그림이에요. 작가 개인의 눈에 좋아 보이는 걸 넘어서 남들이 보기에도 좋아야 하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동시에 남들도 좋아하게 되는,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일의 신조로 정했어요. 대중의 반응을 수시로 살피고 피드백을 받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편이라 일러스트레이터가 천직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개인 프로젝트 <좋아해>를 시작하셨는데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설문을 올린 지 오래됐지만 이것저것 바빠서 아직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한 단계까지밖에 진도를 못 나갔어요. 이 프로젝트가 유형의 물건으로 구현된다면 ‘컬렉팅 북’과 비슷할 거로 생각해요. 사람들의 취향을 자유롭고 다채로운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페이지 한편에는 좋아하는 것을 세세히 적은 글을 정리해서 수록하고 싶어요.
아직 구상 단계군요. 책으로 출간될지도 모른다니 더 기대돼요. 작업을 위한 영감은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원래도 좋아했지만 요즘에는 빈티지 이미지에 관심이 많아서 골동품 시장을 둘러보거나 1960년대 미국의 이미지를 보면서 영감을 얻어요. 최근에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아트북페어〉에서 오래된 우표를 수집한 독립출판물을 발견했는데요.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연구비 명목으로 큰맘 먹고 구매해 소장했답니다. 특히 색을 어떻게 배합해야 좋을지 고민될 때 빈티지한 느낌의 레퍼런스를 자주 참고해요. 옛날에 유행한 색채에 제가 좋아하는 감성의 컬러를 섞으면 현대적이면서 아날로그가 느껴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색감이 탄생하거든요.
특별히 좋아하는 배색은 무엇인가요?
강한 다홍색과 부드러운 하늘색이요. 두 색을 함께 쓰는 것도 좋아하고, 두 색을 중심으로 그림을 전개하는 것도 좋아해요. 두 색을 눈에 담으면 ‘탁’ 하고 튕겨 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개인적인 감상이라 묘사하기가 어려운데, 눈에 잘 띈다는 표현으로 이해해 주세요(웃음). 특히 다홍색은 그림을 한층 비범하게 만들어 주는데요. 분홍 계열이 주는 유쾌함 때문인 것 같아요. 정석에서 벗어나 일부러 다홍색으로 바꿔 칠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효과적으로 밝아지거든요.
색감도 좋지만, 작가님 그림의 묘미는 캐릭터에 있어요. 작품 속 인물이 굉장히 행복한 표정이라 보는 사람도 덩달아 흐뭇해지더라고요.
인물의 눈, 코, 입이 그림의 분위기에 가하는 힘이 크다고 생각해요. 풍경에 인물을 한 명 그려 넣으면 시선의 집중도가 눈에 띄게 높아져요. 무엇보다 그림에 이야기가 생겨요. 예를 들어 바람 부는 언덕을 그린 그림에 인물이 한 명 서 있으면 관람자는 자신의 기분에 빗대어 다양하게 상상하기 시작해요. 왜 저기 서 있을까, 무슨 감정일까, 쓸쓸해 보인다, 슬퍼 보인다, 고독을 즐기는 것 같다는 등 생각을 확장하면서 그림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는 거죠.
작품의 요소를 깊게 고민하는 모습에서 그림을 그리는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강한다운’ 그림은 무엇인가요?
저는 색을 위주로 전개하는 작가예요. 전공자로서 꾸준히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재미를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오래 고민한 결과, 색채가 답이더라고요. 앞서 말씀드렸던 빈티지한 색감을 열심히 연구해 저만의 필살기로 활용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밝고 다정한 색감 덕분에 작가님의 그림은 4계절 중 봄을 연상시켜요. 여러 작품 중 봄과 어울리는 그림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2024년 봄에 벗이미술관에서 가애, 리곡 작가님과 함께 3인전
매번 계절마다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시더라고요. 봄에는 보통 어떤 영감이 떠오르나요?
아무래도 설렘에 매료된 귀여운 사람들을 주로 그리게 돼요. 본가가 대학교 근처라 대학생 새내기들의 풋풋한 모습을 자주 보는데요. 봄에는 사람들이 꼭 새 옷을 입어요. 저는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보여요. 여름이 금방 오니까 새로 산 봄 코트는 곧 더워서 못 입을 테고, 꽃도 금세 시들어버리고 말 텐데. 새 옷을 입고 들뜬 마음으로 계절을 만끽하는 모습, 꽃을 주고받으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모두 사랑스러워요. 그래서 봄이면 그림에도 어여쁜 기운을 담고 싶어져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네요. 작가님은 보통 어떤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끼나요?
요즘은 평온한 상태에서 행복을 느껴요. 예전에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동일하게 여겼는데, 최근 생각이 바뀌었어요. 노력의 결실을 얻는 건 기쁜 일이지만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고,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더라고요. 이루고 나면 허무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개인 작업을 하거나, 하다못해 청소나 주방 시트지를 바꾸는 등 집안일을 사부작거리면서 심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가 혼자 지치는 타입이었죠. 쉬지 못해서 과부하가 온 건지 요새는 온전히 휴식하며 현재에 집중할 때 행복감을 느껴요. 예를 들면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순간, 핸드폰을 깜빡 놓고 산책에 나선 순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만큼 피로가 크게 다가오는 듯해요. 아무래도 일이라는 게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마음에 부채감이 있어요. 과하게 벌인 일을 열정을 다해 메꾸느라 소진이 된 기분이에요. 한동안 외주 작업에 몰두했어요. 프리랜서는 물 들어왔을 때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거든요. 급하게 일을 받아 쉼 없이 작업했는데, 창작하는 입장에서 그림을 돈벌이 수단으로 바라보다 보니 지치더라고요. 분명 좋아하는 일이지만 효율성을 따지면서부터 심적으로 지쳐갔어요. 그리고 저는 자유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바쁠 때는 밥 먹을 시간, 운동할 시간, 개인 여가를 쪼개서 작업을 하거든요. 그렇게 자유가 없어진 순간, 갑작스러운 번아웃을 느껴요.
지나친 작업량으로 소진된 마음을 다시 채우기 위해 어떻게 했나요?
가족, 연인처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고요히 식사하거나 데이트를 하는 등 소박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회복했어요. 소중한 사람들이 주는 다정한 온기가 고갈된 마음에 특효가 있어요. 일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낸 후에는 잠시 작업과 관련된 생각을 멈춰요. 독서와 전시회 관람처럼 인사이트를 얻는 행동은 되도록 피해요.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고 영감을 소화하는 데도 꽤 커다란 에너지가 필요하거든요.
일에 매몰되어 극심한 피로에 시달릴 때, 단순한 휴식이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있겠네요.
또는 운동이 답이 될 수 있어요. 저는 운동에 푹 빠진 사람까지는 아니고, 살짝 귀찮지만 건강한 내 모습을 편애하기 때문에 기어코 운동하는 사람인데요. 물리적인 근육이 곧 마음의 힘이라고 하잖아요. 당장은 힘들어도 잡념 해소에 직방이에요. 주로 아침마다 몸 컨디션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동을 해요. 요가 매트를 펼쳐 혼자서 홈트레이닝을 할 때도 있고, 센터에 나가 폴댄스를 배우기도 하죠. 내 몸이 오늘 뭘 원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요구에 맞게 몸을 움직이는 게 마음 건강을 유지하는 나름의 비결이에요.
작업뿐 아니라 일상을 대할 때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멋져요. 이번 봄, 작가님은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나요?
개인적인 작업,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해치우려고 해요. 작년에는 기업들과 함께 전문적인 일을 하는 데에 삶의 비중을 크게 두었는데요. 올해는 <좋아해> 프로젝트를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거나, 춤을 다루는 동화책을 그리는 등 더욱더 다채로운 작업을 하고 싶어요. 특히 개인 브랜드 ‘어레터프롬’에서 색다른 팝업 카드류를 선보이고 싶어요.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지는 오프라인을 발로 뛰어다니며 방법을 모색 중이에요. 상반기에는 종이를 중심으로 문구류를 전시하는 일본의 ‘카미하쿠’ 페어에 참여할 생각이고요. 하반기에는 전시 일정이 하나 있어요. 컨셉추얼한 이야기를 가미해서 색다르게 풀어나갈 것 같아요.
올해를 도모하며 달뜬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더 설레요. 마지막으로 강한 작가님의 라이프스타일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무엇인가요?
‘봄부터 일찍이 알밤과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로 표현하고 싶어요. 주변에서 꾸준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다는 말을 종종 듣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천성은 근면하지 않아요. 다만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내가 돕는 거예요. 주말에 일을 미리 해두면 월요일이 가뿐해요. 할 일을 빠르게 해치웠을 때 안정감도 크게 느껴지고요. 프리랜서로서 스케줄을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는 건 대단한 특권인데요. 앞으로도 한결같이 겨울 양식을 저장하는 다람쥐처럼 바지런히 일하고 싶어요.
LIFESTYLE LAB 매거진 Vol.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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